[마구의 역사] 한국과 일본 야구 최초의 마구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한국과 일본 야구 최초의 마구

한국 야구에 '마구(魔球)'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2년 일본 유학생 야구단이 모국을 찾아왔을 때다. 《한국야구사》에 따르면 유학생 야구단은 1909년부터 1937년까지 10차례에 걸쳐 모국 방문 경기를 치렀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한국에 비해 훨씬 수준이 높았던 일본의 야구 기술을 배운 그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 서울과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경기를 치르면서 고급 야구를 선보였고 한국 청년들의 분발을 자극하면서 기량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국야구사》는 "1912년 7월 방학을 틈타 동경유학생팀이 제2차 모국방문경기를 펼쳤다. 전번에 중견수로 뛰었던 유용탁은 이번에는 팀의 에이스로 변신, 커브를 능숙하게 던져 관중 사이에 '마구의 왕자'라는 소문이 났고 포수 변봉현과 유격수 이규정도 경쾌무비의 플레이로 관중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야구사》의 유학생 관련 부분은 1930년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길용이 신문에 연재한 《조선야구사》를 참고한 것이다. 《조선야구사》에는 유용탁이 커브를 던졌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마구 투수 유용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마구'는 '치기 어려운 공'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커브라는 구종을 말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한국 최초의 야구팀이었던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는 1913년 일본인 야구팀 성남구락부와 대결했다. 당시 성남은 와세다대학 투수로 빠른 직구를 던지는 하기노가 한국에 오자 그를 팀에 끌어들여 서울에 있던 일본인팀들 가운데 최강을 자랑하고 있었다.

YMCA는 하기노에 맞서기 위해 유용탁을 투수로 내세웠다. 《조선야구사》는 이 경기에 대해 "황성청년회군 선수는 성남 투수 추야(하기노)군의 강구를 맘대로 처리하지 못하였고 이 반면에 성남군 역시 유용탁군의 마구에 타격이 봉쇄되어 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하기노의 강속구와 유용탁의 변화구를 대비시킨 것이다. 유용탁의 커브가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필립 질레트에 의해 야구가 도입된 지 10년이 채 안돼 '우물 안 개구리'였던 당시 국내 야구계로서는 놀라운 기술일 수밖에 없었고 마구라고 불렀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일본에서는 한때 마구가 커브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베이스볼(baseball)'을 '야구(野球)'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진 일본 교육가 츄만 카나에는 1897년 펴낸 일반인을 위한 야구 해설서 《야구》에서 커브를 마구라고 불렀다. 에드워드 프린들의 《커브 피칭의 기술(The art of curved pitching)》이 1904년 일본에서 번역 출간됐을 때의 제목도 《마구술(魔球術)》이었다.

이후 너클볼 등 새로운 구종이 전해지면서 마구는 '브레이킹볼(breaking ball)'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고, '변화구'라는 호칭이 자리잡은 뒤에는 비유적인 표현으로만 사용되게 됐다. 1910년대는 아직 마구가 커브의 별칭으로 쓰이던 때였으니 한국 유학생들이 커브를 마구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본 역시 커브를 처음 선보인 것은 유학생이었다. 미국 유학 중 야구를 배우고 1876년에 귀국한 히라오카 히로시가 일본에서 처음 커브를 던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인 교사에 의해 일본에 야구가 도입된 것이 1872년, 미국에서 캔디 커밍스가 처음으로 공식 경기에서 커브를 던진 것이 1867년이었으니 일본 커브의 역사는 꽤 긴 편이다.

히라오카는 일본에 돌아온 뒤 철도기사로 일하면서 나중에 사업가로도 활동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최초의 본격 야구팀인 '신바시 아슬레틱 구락부'를 만들었다. 그가 미국에서 배워 온 커브가 마구라고 소문이 나면서 많은 학생 야구 투수들이 던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그를 찾았다.

커브가 일본에서 첫선을 보였을 때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아직 오버핸드가 허용되기 이전이었다. 처음에는 "공을 휘어지게 던지는 것은 비겁하다"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1896년 고교생이었던 아오이 요키오가 새로 익힌 커브를 앞세워 요코하마 외국인 클럽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이끌면서 투수에게 필수적인 구종으로 자리잡았다.

유학생에 의해 '마구'가 전파되면서 국내에서도 커브를 던지는 투수들이 나오게 됐다. 일본 제3고교와 도쿄대학에서 투수로 활약한 박석윤은 1922년 제3회 전조선야구대회가 끝난 뒤 동아일보에 관전기를 연재했다.

그는 배재-휘문전에 대해 양 팀 타자들의 홈런을 노린 타격을 비판하면서 "장(의식)군의 커브와 김(종세)군의 스피드볼은 일본에서 대학선수라 하여도 롱스윙을 써서는 치지 못할 줄 압니다"라고 썼다. 배재 투수 장의식의 커브가 일본 대학 타자들도 쉽게 치기 어려울 정도라는 평가였다.

처음 커브를 대한 이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 정도 수준 향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커브는 1960년대에 재일교포 투수들이 국내 실업야구에서 활약하면서 새로운 구종을 선보이기 전까지 한국 야구의 유일한 변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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