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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in 정치] '불신지옥'…"보고 싶은 것만 보는 한국사회"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도 카이사르의 이 명언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끔찍한 착각, 오만, 편견이 팽배한 한국사회… 세상에 상처입고 흉터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우리의 선택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만 부여안는 것뿐이다. 그래서 ‘드라마 in 정치’가 뽑은 2009년 올해의 영화 두 번째 작품은 이용주 감독이 연출하고 남상미, 류승룡, 김보연이 주연한 “불신지옥” 되겠다.

신들린 소녀 혹은 심판자

인간의 사고능력은 과연 얼마나 객관적으로 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내 경우부터 이야기해보자. 나는 가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내 신발을 못 찾는 일이 있다. 신발장 안에는 온갖 종류의 구두, 운동화, 샌들이 있는데 오직 내 신발만 없다. 분명히 별 생각 없이 어딘가 뒀을 텐데…. 누가 신고 간 걸까?

하지만 10초도 안 돼 답을 찾아내곤 한다. ‘아, 내가 신고나온 건 운동화였지.’ 그랬다. 신발장을 뒤질 때 나는 늘 신고 다니던 구두를 생각했다. 구두만을 찾는 바람에 운동화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내 신발이 구두일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이 생각과 관찰력에 영향을 끼친 셈이다.
어쩌면 인간의 사고는 원래 하자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담아낸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현실에 발 딛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다. 이 그릇된 믿음에 기초해 타인을 재단하고, 모욕하고, 좌지우지하려 든다. 자신도 모르는 오만이고, 실은 좀 측은한 편견이다. 영화 “불신지옥”은 이 어처구니없는 착시현상을 무속신앙과 기독교를 넘나드는 잘 짜인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다.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고생스럽게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희진(남상미). 어느 날 그녀에게 동생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기도에 빠진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던 소진(심은경)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급히 달려 내려온 고향집은 을씨년스럽다. 기도하면 돌아올 거라며 교회를 들락거리는 엄마(김보연)도, 단순가출로 여기고 성의 없이 수사하는 형사(류승룡)도 희진이 보기엔 심란하다.

긴 복도에 대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아파트.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처를 숨긴 채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복도를 지나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에 반색을 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몸을 웅크린다. 그런 아파트 주민들 사이로 은밀한 소문이 돌았다. 소진이가 사실은 신들린 아이였다는 것.

소문과 함께 사람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소진이를 돌보던 위층 여자 정미(오지은)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아파트 경비원 귀갑(이창직)은 농약을 먹고 죽은 채 발견된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도 나타났다. 무당인 경자(문희경)는 희진의 머리를 둔기로 후려치고, 옆집 사는 소설가 수경(장영남)은 형사더러 자기 좀 잡아가 달라고 호소한다.

희진에게도 알 수 없는 변화가 찾아온다. 자꾸만 헛것이 보이고 꿈에 죽은 사람의 환영이 나타났다. 뭔가에 쓰인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이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한국사회에 드리운 맹신의 그림자

그것은 ‘신들린 소녀를 향한 잔혹한 욕망’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질병에 대한 두려움, 독재시절에 대한 향수… 이런 흉터를 간직한 사람들에게 신들린 소녀는, 두려움에 찌든 삶의 유일한 탈출구로 보였을 것이다.

소녀를 작두에 태우고 그 피로 부적을 만드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기적인 욕망만 번뜩일 뿐이다. 도움을 청하는 소녀의 위급한 상황은 들어오지도 않는다. 공포심이 빚어낸 신앙, 욕망에 눈이 먼 신앙이다. 우리는 이것을 맹신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맹렬하게 추구하는 광기에 찬 사고방식 말이다.

맹신은 무속신앙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소녀의 엄마는 얼마 전 남편을 잃었다. 갑작스러웠던 가정의 해체는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그녀는 기독교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진이가 이상해졌다.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한다.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는데 그럼 혹시?

“소진이가 그랬어. 전부 다 죽을 거라고. 소진인 선택받은 아이야. 스스로 자기 몸을 내어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재림하신 구세주야. 이제 소진이가 다시 부활할 거야. 이 세상을 끝내고 심판을 시작할 거야. 소진이가 일어서면 우리 가족이 천국에 모일 수 있겠지. 거기선 소진이도 안 아프고 너도 고생 안 해도 돼.”

아파트 주민들에게 신들린 아이였던 소진이가 엄마에겐 심판자고, 구세주였다. 맹신자는 무속신앙이든, 기독교든 가리지 않는다. 어차피 맹신자에겐 모든 종교가 ‘기복종교’일 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들어주면 된다. 마음의 흉터만 덮어주면 된다. 믿음이 좌절될수록 더욱 매달린다. 차라리 광신도가 돼버리는 게 편하다.

고로 이 영화는 맹신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제목은 왜 “불신지옥”으로 정했을까? 영화를 연출한 이용주 감독은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정부 역시 기복종교의 산물이 아닌가? 바르게 사는 걸 버리고 오직 잘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대통령을 뽑았으니까.”

어쩐지 ‘맹신’ 혹은 ‘기복종교’가 이 시대를 규정하는 상징인 것 같아 마음이 스산해진다. 그렇다면 ‘먹고사니즘’을 맹신하지 않으면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는 한국사회의 광기 속에서 ‘믿지 않는 자’가 머물 곳은 ‘불신지옥’뿐인 걸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나는 ‘불신지옥’을 탈출할 출구 하나를 발견했다. 상처입고 고립됐다가 죽은 자들이 서성이면서 말을 걸어오는 곳, 아파트의 복도 쪽 창문 말이다.

[권경률 ㅣ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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