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취재기] 피로 싹, 정신 번쩍…'화룡점文'의 놀라운 효과

문재인 대통령은 2박 3일 평양 일정을 마친 직후 대국민보고를 위해 서울 프레스센터를 찾았다. 사진은 문 대통령이 20일 대국민 보고와 질의응답 이후 취재진에게 악수를 건네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 어깨 위 무거운 책임에도 "국민께 감사"

[더팩트ㅣ임현경 인턴기자] "진짜? 진짜 여길 온다고?"

'달(Moon)'이 뜬다고 했다. 2박 3일 동안 가족보다 더 자주 많이 한참 들여다본 얼굴의 주인공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양 땅에서 환히 웃고 있던 그 사람이 이곳에 온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설레발을 떠는 동료 PD에게 시큰둥하게 "피곤해 죽겠는데 설마 오겠어"라고 답했다. 말과는 달리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20일 오후 서울 중구 DDP(동대문디지털플라자)에 마련된 남북정상회담 프레스센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곳으로 와서 대국민 보고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 공식 일정이 18일 오전 청와대 관저에서부터였으니, 꼬박 60시간 업무를 본 셈이었다. 문 대통령의 몸은 강철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귀여운 강아지들은 사실 폭발물을 탐지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사진은 폭발물탐지견들이 문 대통령의 방문에 앞서 서울 프레스센터를 탐색하는 모습. /임현경 인턴기자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메인프레스센터를 나오니 저 멀리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1000명이 넘는 사람들과 북적거리다 만난 귀여운 네발 손님이 어찌나 반갑던지. 이름은 '비차'라고 했다. 관계자의 허락을 받고 얌전히 배를 붙이고 앉아 있는 비차와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차에 선배 기자가 신기한 듯 물었다. "야, 너 이렇게 폭발물 탐지견을 교란해도 되는 거야?" 언제 어디서든 폭발의 위협을 안고 지내야 하는 직위, 대통령의 도착이 임박했다는 의미였다.

평양국제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기, 남북 정상의 뜨거운 포옹, 백두산 장군봉 전경이 수시로 중계됐던 커다란 화면에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는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18일 환영 만찬에서 김 위원장에 대한 답사로 한 말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나란히 줄을 섰고 취재진은 분주해졌다. 드디어 문 대통령이 오후 6시 35분께 센터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일을 멈추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문 대통령이 무대 위에 오르자 평양의 풍경이 생중계됐던 커다란 화면에는 이같은 문장이 나타났다. 사진은 문 대통령이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대국민보고를 진행하는 모습.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성원해 주신 덕분에 평양에 잘 다녀왔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대통령의 첫 마디였다. 문 대통령은 모든 공을 '존경하는 국민'에 돌렸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의 확고한 비핵화 의지를 거듭, 거듭 확약했다"며 "북한이 평양공동선언에서 사용한 참관이나 영구적 폐기라는 용어는, 결국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폐기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설명했다.

남북 관계는 물론 경제 성장, 비핵화, 종전, 국제 관계까지 막중한 질문들이 뒤따랐다. 문 대통령은 '종전'과 '평화협정'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며 주한미군 철수나 유엔사 지위 해체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했다. 문 대통령은 종전은 정치적 선언 개념이며 이후 평화협상, 완전한 비핵화, 평화협정이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런(유엔사 지위) 문제는 완전한 평화협정 체결 후 다시 논의될 수 있고, 주한미군 문제는 한미동맹으로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한미 간 결정에 달린 것"이라 선을 그었다. 또, "이번 방북을 통해 저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제가 말한 것과 똑같은 개념으로 종전선언을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그의 머리 위에 띄워진 글자 10개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 보였다.

문 대통령은 피곤한 기색 없이 모든 공을 국민에 돌렸다. 사진은 문 대통령이 2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퇴장하기 전 2박 3일 동안 행사 진행을 도왔던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하는 모습.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 대통령은 끝까지 국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누구보다 고된 일정을 소화했을 그가 주저 없이 수차례 허리를 굽혔다. 무대에서 내려와 취재진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자신을 보기 위해 통로에 모여든 주최 측 자원봉사자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숨 가쁜 일정에 스스로 잊었지만, 그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을 행한 '국민'이었다.

공항 영접, 대중 연설, 백두산 등반 등 이번 정상회담에서 벌어진 파격적인 일들은 다 보도된 상황이었고, 내일이면 평양에 다녀온 각 분야 관계자들이 지난 2박 3일을 친절히 설명해줄 터였다. 다들 '여기 올 이유가 없다'고 회의했지만, 문 대통령의 이유는 국민이었다. '우리 겨레' '한반도 평화'가 크게 와닿지 않는다던 외신 기자들도 이때만큼은 멍한 표정으로 연신 손뼉을 쳤다. 곳곳에서 기립박수가 나오기도 했다.

커피를 하루에 석 잔씩 마셔도 가시지 않았던 몽롱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문 대통령이 퇴장한 뒤에도 써야 할 기사가 남아있었고, 집에 가선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해결해야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인, 여느 때와 같이 피곤한 하루의 끝일 뿐인데, 당장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새로운 미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imar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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